이순재 할아버지에 대한 짧은 사적인 기억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 명절 때만 되면 이순재 할아버지를 뵐 기회가 있었습니다. 제가 살던 아파트에 그분의 아드님 댁이 있었기 때문이죠. 초등학생이었던 저는 그때마다 “국민 배우를 실제로 보게 되다니!” 하는 신기함에 들뜨곤 했어요. TV 속 권위 있는 모습과 달리, 엘리베이터에서 뵙던 할아버지는 마주칠 때마다 두 손 가득 선물 보따리를 들고 계셨고, 말로 표현하기는 좀 어려운데, 뭔가 아우라가 느껴지는 그런 어른이셨던 것 같아요.
한 번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 할 때 제가 부랴부랴 뛰어들었던 적이 있었는데, 마침 이순재 할아버지가 타고 계셨고,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죄송하지만, 5층 좀 눌러주시겠습니까?”라며 정중히 엘레베이터 층수를 눌러달라는 부탁을 해오셨어요. 카리스마 넘치는 중년배우가 그렇게나 정중히 부탁하다니.. 저는 한참이 어렸지만, 그 말씀 한마디에 담긴 예의와 배려는 그렇게나 한참이 어린 저에게 꽤 크게 와닿았던 모양이었는지, 그 이후에도 그 찰나가 꽤 오랜 기간동안 생각났어요.
“아, 유명한 분도 저렇게 정중하게 부탁을 하시는구나.” 하고 말이죠.
시간이 흐르면서 TV에서 이순재 할아버지를 볼 때마다 저는 그 짧았던 순간을 떠올렸습니다. 코미디 프로그램이든 정극 드라마든, 화면 속에서 여전히 단단한 발성과 표정을 선보이는 모습은 제게 묘한 반가움으로 다가왔습니다. “아, 그분이 바로 5층 버튼을 눌러달라고 하셨던 분이시구나.” 하며 살짝 미소 짓게 되기도 했습니다.
배우 이순재의 품격
그런 의미에서 할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키워드는 ‘겸손’과 ‘감사’입니다. 물론 우연히 엘리베이터에서 뵙던 젊은 시절의 중후함도 기억나고, 수많은 작품에서 왕성한 연기 활동을 보여주시는 현재의 노익장 이미지도 떠오릅니다. 하지만 배우 이순재는 단순히 ‘오래 연기한 배우’가 아니라, 인생 자체를 우직하게 쌓아올리신 분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후배나 학생들에게도 늘 조언을 아끼지 않고, 예의를 지키며 사람을 대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날의 짧았던 부탁이 우연이 아니었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제가 이순재 할아버지께 바라는 것
2025년에 이르러 받은 대상 소감에서도 맡은 바 소명을 다하는 한 대학의 교수이자, 존경받는 원로 배우로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신 데에는 그동안의 삶에서의 분투가 있으셨겠지요. 하지만 저는 조금 다른게 보였습니다. 모두에게 감사를 표현 방식. 본인의 연기로 제자들이 보여준 양해에 감사를 돌리셨어요.
저도 언젠가 묵묵히 하다 보면 감사할 날이 올 것이라 믿으며, 소신 있는 삶을 살아갈 용기가 솟아나길 간절히 바랍니다. 2025년이 저에게 그러했으면 좋겠고, 먼 발치서 오랜 팬이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감히 바라길, 이순재 할아버님께선 더 오래 그런 귀감이 되어주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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